담박질

꽃샘 추위와 함께 한 서울마라톤

곡우(穀雨) 2006. 3. 13. 23:57

마라톤은 단순한 운동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원시성에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아무나 마라톤을 할 수는 없다.

마라톤은 몸의 임계점을 통과하는 운동이다. 심장이 파열하는 듯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철저하고 세심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비굴한 자, 안락에 길들여진 자, 게으른 자, 이기적인 자는 마라톤을 할 수 없다. 몸을 완벽하게 영혼의 통제에 둔 자만이 경주에 참가할 수 있다.

제 몸을 통제하는 자의 영혼은 고결하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고결하다.

맑은 물길을 품은 청계천변을 달리는 마스터스 선수들을 바라보며 나는 잠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달리는 인생은 아름답다! 오,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봄이 오는 길목에서 펼치는 서울마라톤!

아내가 새벽 잠 깨고 지어준 찰밥을 차곡차곡 먹어 두고 준비해 둔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경복궁역에 도착하니 출발시간이 10여분밖에 남지 않았다.

물품보관 차량이 07시 30분에 골인지인 잠실종합운동장으로 출발한다는데...

지하철역 통로에서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E그룹을 찾았다.

어렵사리 수선화님을 찾아 인사를 나눴다.

퍽이나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른 아침에 대회에 참여하는 부지런함이 대단도 하다.

잘 달리기를 서로 당부하고

 

엘리트 선수들의 출발이 08시 정각이고 그 뒤로 명예의 전당회원, 이어서 A그룹부터 F그룹 순으로 시간차를 두어서 출발시킨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한 시간 이상을 찬 바람 속에 덜덜거렸다.

어제보다 섭씨10도나 낮은 기온이고 한파주의보까지 발동된 혹한이다.

비닐백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8시 43분 마지막 F그룹에서 출발-

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달리려니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F그룹 주자들 속에서 계속 앞 사람들을 추월해야 하는데 앞 사람의 다리를 걸지 않으려 필요 없는 힘이 쓰인다.

내 페이스와 비슷한 주자를 한 명 발견하고 바짝 뒤따라 가는 요령으로 한참을 달렸다.

 

50여분 지났을까? 청계천 반환점을 지나 친구분과 동반레이스를 즐기고 있는 수선화님을 만났다.

얼마나 행복한 모습인지-

다정한 친구와 함께 하는 동반주는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효과가 상당할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와 함께 한 잠깐 동안의 동반주-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길 바라며 헤어진다.

다시 파워콤 주자를 따라잡는다.

 

벌써 소변기가 느껴진다.

추운 날씨 속에 너무 긴 시간을 긴장하며 기다린 탓일 게다.

많은 달리미들이 을지로, 청계천 상가부근 아무 골목에나 들어가 신세?를 지고 다시 나선다.

저렇게도 못하는 여자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좀 신경 쓰이지만 참는데 까지 참아보기로 하고

 

종로에 접어들어 보니 주로는 교통을 통제하여 차없는 넓은 광장이 달리미들만의 행렬로 가득하다.

오늘 드디어 종로 대로를 팬티차림으로 내달린다.

평소엔 스트리킹 경범죄 단속 대상감이고 또 이렇게 장시간 지속할 수도 없을 것이다.

대낮에 원초적인 자유를 만끽한다.

좋다.

한 없이 좋다.

건강하다는 사실이 좋다.

정말 좋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주로 반대편의 차량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량매연

바람에 날려오는 매연이 유일한 불만거리였다.

날씨가 춥지만 타이즈와 껴입은 티로 적절하게 방어되고 있고 상당히 센 바람도 입상권과 아예 차원이 다른 나에게는 큰 불만거리는 아니다.

 

천호대로!

이 넓은 도로에서는 야생마처럼 힘껏 질주해보고 싶다.

가슴이 터지도록 내달려보고 싶다.

거칠 것 없는 자유인이 되었기에

남은 거리에 대한 부담만 없다면 그리해보고 싶지만 이제 겨우 하프부근에 위치한 처지에선 그러면 안된다.

도로 중앙으로 들어가 달려보았다.

달리미의 행복감을 더 느껴보려

 

장안동에서 중랑천을 건너며 25킬로 지점도 무난하게 지났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10여 년을 살았던 제2의 고향도 마음으로 보듬으며 달린다.

벌써 먼 옛날의 기억이지만

 

세종대 부근의 언덕 주로는 좀 힘 들었다.

시계를 랩타임에 맞추지 않고 그냥 눌러댔더니 스플릿타임에 맞춰져 있어서 구간별 기록 체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쓸모 없는 시계가 되어버렸다.

이 대회를 위해서 거금 80,000원이나 투자했는데…

 

30킬로 지점에서 일마 회원 한 분이 주로 가운데까지 뛰어 들어와 건네준 음료 한잔-

맛도 좋았지만 무척이나 고마운 성의였다.

처음 입은 일마 유니폼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응원 덕분에 힘도 났다.

지나치는 일마회원들마다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파이팅을 외치는 나도 힘이 난다.

 

마라톤은 30킬로부터가 본게임이라 했지…

실제로 오버페이스 하지 않으려 여태까지 무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26분대를 유지하면서 달린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힘을 내서 달려야 하는 구간이다.

체력이 떨어져 있으므로 이전구간보다 더 힘을 내서 달려도 기록은 덜 나오게 되어있다.

좋고 나쁜 기록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부터이니 무조건 파이팅만이 필요하다.

종반에 접어든 달리기는 어떻든 힘들어 걷고 싶고 그저 드러누워 쉬고 싶다.

그러나 휴식은 대회가 끝나면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

남은 시간에서 고통은 짧지만 희열의 기억은 오래간다.

평생 간직할 추억을 만드는데 지금의 짧은 고통에 무릎 꿇을 수는 없다.

힘을 내자.

지난 겨울 동안 혹한의 칼바람 속에서 기다려온 승부가 바로 이것인데 이 정도의 고통 앞에 고개 숙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달리자.

마지막 한 방울의 글리코겐까지 뽑아 올려 달려보자.

 

위치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35킬로 부근에서 3시간 50분 페메를 따라잡고…

출발시 준비했던 파워젤은 아직까지 양쪽 장갑 속에 잘 챙겨져 있다.

38킬로부근에서 한 개의 파워젤을 까 먹었다.

달리는 중이라 목을 넘기기에 부담스러웠지만 천천히 착실하게 삼키며 달린다.

마른 헝겊을 비틀어 힘을 짜내어 달린다.

호흡이 걸음마다에 이를 때까지 끌어 올린 달음질 속도는 참기 힘들 때 좀 늦춰준다.

그리고 다시 짜낸 땀 방울이 이마에서 귀 옆을 타고 턱 쪽으로 흐르는데,

세찬 바람이 걸음에 힘을 더 보태라며 장벽처럼 앞을 막아 선다.

명령에 거부하는 하체를 억지로 다그치며 무거운 군장 맨 돌격대처럼 돌진한다.

호흡이 짧아지고 가슴에 압박이 더해온다.

그러나,

가슴은 터지지 않는다.

달리다 쓰러질지라도 오늘은 힘껏 내 달려야 한다.

 

다시 40킬로 지점에서 나머지 한 개의 파워젤을 짜 넣었다.

체력의 부담이 극한까지 도달하진 않는다.

힘이 들긴 하지만 할만 하다.

 

드디어 잠실 종합운동장 앞-

거대한 시설물들이 이 순간의 주자를 위해 도열해 있다.

개선문을 향해 달리는 뿌듯한 가슴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러 간다.

‘골인 후의 하체에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중 후회하리라-‘

경기장 입구의 응원 인파에 얼굴 줄 여력도 없이 양 다리에 모든 것을 투입하며

영광스런 병사처럼 종합경기장에 들어섰다.

 

경기장에 들어서면 바로 골인점이 마중할 줄 알았는데, 웬걸..

주경기장을 거의 한 바퀴를 돌아서야 하는 곳에 골인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맥이 빠졌지만, 트랙에 들어서는 순간 좋은 질감의 바닥 쿠션이 선택 받은 자의 만족으로 바꿔 주었다.

황영조처럼 행사의 주인공으로 트랙을 돌았다.

많은 달리미들과 함께 하는 골인 레이스였지만 이 순간은 오직 나만의 영광이다.

모두가 장거리 여행의 피곤함으로 느린 움직임이었지만 나만은 힘차게 박차는 뜀박질로 골인점으로 향했다.

악을 쓰면서 돌진했다.

두 팔 힘껏 들어 올리고 42.195의 끝으로…

 

응원 나와준 아내와 딸내미한테 고맙다.

훈련 때 지원해 준 덕분에 오늘의 힘찬 완주가 가능했다.

 

출발  08시 43:00

5km   09:09:50

10km 09:35:32

15km 10:01:02

20km 10:26:14

25km 10:51:08

30km 11:17:50

35km 11:44:31

40km 12:10:56

도착  12:22:38

총 3시간 39분 3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