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베란다 문화 유감

곡우(穀雨) 2004. 6. 21. 17:52

대전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한 가족이 참변을 당했단다.

학교 선생님이던 아빠와 딸이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는데 딸은 다행히 나무에 걸려 죽지는 않을 정도의 중상을 입었고, 아버지는 그대로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고 한다. 15층에서 떨어졌으니 살아난 딸의 운명이 기이할 정도이다.

 

아파트 문화가 이 땅에 정착된 연유는 지금의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록 설득력 있는 시대적 상황에 근거한다.

땅은 좁은데도 베이비-붐 세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주택수요로 인해 아파트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점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분명히 이러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의 과잉공급(?)이라는 주장에 또한 수긍가는 측면이 있으니 땅값 무지 싼 촌에까지 고층 아파트가 보급되고 있는 점이다.

 

도시의 주거문화는 다른 도리없이 아파트에서 시작해서 아파트로 끝나는 게 요즈음의 시류이고 보니 누구도 중력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셈이다.

 

소방체계와 관계없이 고층아파트의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극각의 위급상황이다.

당연 탈출 방법은 제한적이다.

콘크리트 벽을 통과하여 옆집으로 대피할 수도 없거니와 날개짓을 하여 밖으로 날아갈 수도 없다.

 

입구가 하나 뿐인 굴속과 같은 아파트에서 갇힌 모양으로 불이 났으니, 일단 베란다로 대피를 하지만 다음엔 어디로 갈까?

아무리 날랜 사람이라도 아랫집 베란다로 대피하기는 어렵다.

거기엔 베란다 새시라는 유리벽이 절벽면을 구성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파트 내부에 짧으막한 줄이라도 비치되어 있고 아랫집 베란다가 틔어 있으면 위급할때 아랫집으로 매달려 대피라도 할 수 있으련만, 그냥 뛰어 내릴 수 밖에 없는 15층은 너무나 높다.

 

베란다 구조라는게 칸막이를 제거하여 이웃세대로 대피하게끔 되어 있었으나 요즘의 아파트에 그 규정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 누가 알일인가?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마다 불법구조변경금지 한다는 벽보는 많이도 붙어 있지만 그 벽보 무서워하는 사람 얼마나 될까? 

 

모두가 베란다를 터 내서 거실, 방에 확장해 버리니 서비스 면적으로 제공되어진 베란다가 전용면적 이외의 절대 사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진지 이미 오래다.

 

아이들의 발길질에도 망가져서 대피로가 되어져야 하는 칸막이는 존재하지 않고 꽉 막힌 벽일 뿐이니 화재나 강도의 위협에 대피로로 이용되어져야 할 칸막이는 이제 없는 셈이다.

 

수직. 수평의 대피로 기능은 우리 아파트에서 기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운에 맡기고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수 밖에 없는 우리 아파트-

입구가 하나 뿐인 꽉 막힌 굴속에서 그저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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