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해석-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에게 한 해석'이다.
정신과 분야의 인지치료에서는 '부정적 내적 신념'이라고 부른단다.
남들 따라 한시 읊조리다보니 재밌는 생각이 들어 적어본다.
동방규(東方叫) 소군원(昭君怨) 이다.
漢道初全盛 (한도초전성) 한(漢)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辛苦遠和親 (신고원화친)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 (엄체사단봉)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銜悲向白龍 (함비향백룡)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낭경희) 선우는 놀라 기뻐했으나
無復舊時容 (무부구시용)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왕소군의 허리가 가늘어진 것이 원제를 그리워해서라는 동방규의 한시 소군원.
한나라 궁녀였던 왕소군이 흉노왕 호소야를 따라 갔던 내몽골은 확실히 오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입궁한지 5년이 되도록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했던 궁녀시절보다, 흉노오랑캐라 불리우지만 왕비로 살았고 남편 사후엔 다시 후왕의 비가 되었으니 여자 팔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어찌 있으리?
그래서 중국사람들도 남자들은 왕소군을 불쌍하다고 하지만 중국여인들은 왕소군을 행복한 여자라고 한다는데..
왕소군이 궁녀로 들어 갔다는 싯점이 서한 말기인 한원제 시절 BC38년이라 하고, 동방규가 총애받았다던 측천무후의 시절은 AD700년 무렵이므로 700여년의 시차가 나니 동방규가 흉노 궁궐 사정을 어찌 알 수도 없을테다. 시집 간 왕소군의 허리 가늘기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 중국남편 그리는 마음으로 애태워 옷이 안맞게 될 정도로 허리가 가늘었다니...
실소가 절로 나온다.
대개의 한인들처럼 동방규도 중화사상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던 모양이다.
왕소군이 중국 4대미녀라 불리우므로 그 남자들은 중화사상에 근원하는 자존심 때문에 연민의 정을 가지리라.
동방규가 이처럼 보편적인 중국인이었음에도 그의 시 [소군원]이 우리나라에서 시성 이태백의 시 [왕소군]보다도 더 많이 회자되는 것은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을 써 먹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겠다.
주말에 씰데없는 자기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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